1800개 촛불 앞 바위조각품, 그 신비함에 숨이 멎다

 

  • 요르단 페트라 바이 나이트

수백 명의 여행자가 1800개의 촛불로 밝힌 협곡에서 앉은 채로 장밋빛 사암 바위벽을 조각해 만든 ‘파라오의 보물’ 알카즈나(트레저리)를 감상하고 있다. 나바테아왕국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은 가로 28m에 높이가 40m나 된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한 발 한 발.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와디(사막의 계곡)무사의 밤하늘에 걸린 반달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 거기에 바닥의 촛불까지 더했건만. 이런 소심(小心)이 어둠 탓만은 아니다. ‘페트라’라는 가공할 인류유적 앞에서 갖는 경외감이 더 큰 이유다. 2800년 전. 여기 처음 당도한 나바테아인들도 그랬으리라. 도대체 폭이 3∼4m밖에 되지 않는 200m 높이의 좁은 바위 틈새는 얼마나 길지, 그걸 통과하면 과연 뭐가 나타날지. 두려움과 호기심이 그들 발걸음을 더디게 했을 터이니 오늘 밤 나의 이 더딘 걸음도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바위 틈새로 들어서니 달빛 별빛은 언감생심이다. 오로지 의지하느니 2m 간격으로 놓아둔 바닥의 촛불뿐. 틈새 좁은 밤하늘로 별과 달이 신비롭다. 이렇게 걸은 게 1.2km. 갑자기 정면이 밝아온다. 협곡의 막장이자 페트라 고대도시의 초입인 ‘알카즈나’ 유적이다.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짧은 탄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1800개의 촛불로 밝혀진 알카즈나의 장대하고 고아한 모습 때문이다. 붉은 사암의 장밋빛깔 절벽에 새겨진 조각건축은 촛불에 반사돼 더더욱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파라오의 보물’이란 뜻으로 ‘트레저리(Treasury)’라고 불리는 이 유적. 기원전후 1세기경 이집트나 그리스에서 초빙해온 조각가의 솜씨임에 틀림없다.

그 앞에 수백 명이 앉아 있었다. 어떤 소음도 없이 적막한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미동도 없이 앉은 이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 그 모습은 경건하기만 했다. 나바테아 사람들도 이랬을까. 그걸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전통악기 라바바(비올라와 바이올린의 원조로 추정되는 두 줄의 아랍 전통 현악기)연주가 시작됐다. 바위 협곡에 울려 퍼지던 그 신비로운 음색과 선율. 지금도 귀에 선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 거대한 절벽을 파내 바위 전체를 신전처럼 보이도록 만들겠다는 계획. 그걸 왕의 무덤으로 쓰겠다는 생각. 모두 나바테아인의 아이디어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2000년도 전에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이런 상상 초월의 건축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들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이곳은 세계 무역로의 중심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뉴욕쯤 될까. 당시 무역은 낙타에 물건을 실어 장거리를 이동하는 대상의 전유물. 아라비아와 지중해를 잇고 훗날에는 실크로드로 이어졌다. 그들이 바로 이 대상민족이었다.

유목민이었던 이들은 아라비아반도 남부에서 북쪽으로 이동 중 기원전 6세기에 이곳에 당도했다. 그리고 여기에 도시를 건설했다. 그 도시가 ‘페트라’고 최전성기인 기원후 1세기엔 인구 3만5000명 규모였다. 페트라는 대상 이동로였고 그들은 이 도시에서 대상들로부터 통행세(세금)를 거뒀으며 또 스스로 대상무역에 종사했다. 훌륭한 건축물은 훌륭한 건축주가 있어야 나온다. 금융업은 모든 고급 건축물의 건축주다. 그때도 같다. 페트라의 시크(Siq)라고 불리는 이 바위 틈새 협곡은 이 도시로 들어오는 요새형 통로다. 대상은 이 협곡 밖으로 우회했다.

내년은 이 페트라가 한 스위스인에 의해 서방에 알려진 지 꼭 200년 되는 해. 이 기념비적인 해에 페트라 방문은 더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페트라 바이 나이트(Petra by Night)’에 참가한 뒤 이튿날 아침 되찾기를 권한다. 감동이 훨씬 진하다.